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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천면 송백리-전영동과 영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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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시립박물관 작성일 2007-12-05
담당자 관리자 조회 2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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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면 송백리 서쪽 산기슭에 ""영동당""이란 사당이 오래 전부터 허물어진 채 낡은 기와조각들만 머리에 이고 200~300년이나 된 듯 한 참나무 숲 사이에 가려져,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것을 최근 본래의 사당 모습만 어렵사리 복원해 놓은 “전영동”이란 풍신(풍신)을 모신 사당을 찾을 수 있다. 전영동은 고려 공민왕 때 실존인물이라 전하며, 그가 태어나자 무려 3년 동안이나 초목에 잎이 돋지 않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무엽동(無葉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는 성장하여 경산의 현리(縣吏)가 되었는데, 그는 고을 밖 30리 떨어진 곳(남천면)에 살면서도 진시(辰時-오전 7시)에 출근해 신시(申時-오후5시)에 퇴근하였다는데, 항상 그는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고 하며 평생을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무적만 먹었다고 한다. 음력 2월 초하룻날 죽을 무렵에 유언(遺言)으로 말하기를, ""죽으면 풍신이 되어 생민(生民)에게 돌림병을 옮기는 귀신인 여귀를 물리치겠노라""고 하였다. 그 후부터 고을 사람들은 이날이 되면 무와 찰밥으로 복을 비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영동당은 처음 남천면 구일리와 경산시 옥곡동 사이 구 국도변에 있었다 하는데, 그 앞들을 지금도 당 앞이라 부른다. 당시는 이 사당 앞을 지나려면 모두가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하였다는데, 어느 날 동래부사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말에서 내리지 않자 말의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한다. 그러자 화가 난 동래부사는 영동당을 불태우게 하였다, 사당에 불이 붙자 사당 안에 모신 신주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 남천면 송백리에 가 내려앉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신주가 내린 자리에 사당을 짓고 그 동네에서 가장 큰 무가 생산되는 집 대주가 제주가 되어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제사를 지냈다 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좋은 날을 받아 정성을 모아 깨끗한 음식을 준비하고 재주는 제사 지내기 전 찬물에 목욕하고 밤 12시경에 제사를 지낸 후 마을 사람들이 동회관 등에 한자리에 모여 제사 음식을 나눠 먹었다고 전하고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추풍령 이남지방에서는 음력 이월 초하룻날 새벽에 새 바가지로 정화수를 떠놓고, 풍년과 수복을 비는 영동 소지를 올려 왔다. 남은 소지 종이는 연을 만들어 멀리 띄워 보기도 했다. 또 음력 2월에는 빈소의 문을 열지 않고, 개고기를 먹지 아니 하였다고 하며, 제사에 쓸 벼를 말릴 때 참새가 그 벼를 까먹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이 마을의 영동제는 6.25 이후 멈춰졌으며, 신위를 모신 “영동당” 마저 완전히 허물어져 `전영동 전설` 자체가 잊어져 가고 있었으나, 2004년 경산시에 의하여 사당이 다시 복원되고 있다.

<자료제공 김종국(구비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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