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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상 불력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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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시립박물관 작성일 2008-02-12
담당자 관리자 조회 3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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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은 군사적으로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한 전초기지였으며, 당시 신라 호국불교의 본산이기도 하다. 또한 경산은 지형적으로 사방이 넓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져 있어 자연성곽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한 번도 직접적인 외침을 받아본 적이 없는 고장이다. 이러한 상황은 경산이 위치한 지형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이곳이 전통적인 호국불교의 성지란 것이다. 경산에 위치한 외곽지의 높은 산은 하나같이 불지요, 이름 높은 옛 고승들의 수도처 이다. 그 중에서도 와촌면에 소재 한 팔공산은 우리나라의 불교 역사를 대내외적으로 대변하는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수도한 고승들이 우리나라의 불교역사를 제패하였고 또 오늘에 이르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전승한 장본인들이다. 경산에서 출생한 원효대사는 그가 29살 때 처음 승려가 되면서 이곳에서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하였고, 신라 41대 헌덕왕의 아들 심지왕사도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29살 때 서울 황복사에서 승려가 된 의상대사 역시 최초의 수도처가 팔공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팔공산은 한국의 수많은 고승대덕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또 팔공산 곳곳에 그들의 행적을 남기고 있다. 경산 쪽의 팔공산 준령에는 신라 때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는 3개의 고찰이 천 여 년의 역사 속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 각기 나름대로 보수된 채 남아있는데 와촌면 대한리 소재『솔매기』를 중심으로 서쪽 준령에 신라 소지왕 때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선본암이 있고, 서북쪽 준령에는 연대는 밝혀지지 않으나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원효암이 있다. 또 동북쪽에는 신라 흥덕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천성암이 당시 모습들은 아니지만 그간 수 차례의 중수기록과 함께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와 의상대사는 불가에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입적하였으나 불가에서 만난 인연으로 서로 간에 형(원효), 동생(의상)이라 부르며 각 기의 학문에 전념했는데 학문에 대해서 서로간의 의견을 내세울 때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서로가 팽팽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의상이 자신이 수도하는 암자에서 원효에게 사람을 보내 점심 약속을 청했는데 사실인즉, 의상대사는 하루에 두 끼 식사를 하는데 매 식사마다 자신이 직접 밥을 지어먹지 않고 그때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천공(밥)을 받아먹었다 하며, 반면 원효대사는 공양주에게 의존치 않고 자신이 직접 밥을 해먹었다고 한다. 이에 의상대사는 자신의 위세를 원효에게 과시하여 원효의 기를 꺾기 위함이었는데, 원효는 이러한 속셈인 의상의 점심초대에 그 연유도 묻지 않고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고 한다. 원효와의 약속이 이뤄지자 의상은 한 끼에 한 그릇의 공양만 전달해주는 선녀에게 미리 부탁하여 다음날 약속시각에는 두 그릇의 공양을 준비토록 당부했다. 선녀는 의상의 당부에 시간을 맞춰 차질 없이 거행할 것을 언약하였고 의상 역시 몇 번이나 이를 다짐하였다. 어느덧 두 사람의 약속 날이 다가왔다. 의상은 손님맞이 준비에 바빴고, 제반 준비 또한 한 치의 차질도 없었다. 근엄하게 차려입은 의상은 약속시간에 홀로 암자에 당도한 원효를 정중히 맞아들였고, 원효 역시 감사히 그의 마중을 받았다. 오전 내내 의상과 원효는 서로간 부처님의 진리터득을 위한 자신들의 소견을 피력하기에 바빴고, 그들의 학문적 토론에는 서로 간에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학문경쟁에서 어느새 약속한 점심시간이 되었다. 의상은 지금껏 손님대접으로 원효에게 다소 양보도 하였으나 이제 점심 공양 시는 그의 위세가 꺾여지리라 생각하며 그의 놀라는 모습을 상상하고 잊으려는데 느닷없이 “스님! 공양시간이 넘었지 않소!” 하며 원효가 점심을 독촉하자 의상은 얼떨결 문밖의 해를 바라보니 벌써 정오가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의상은 급한 김에 다과를 다시 권한 후 밖으로 뛰쳐나가 하늘을 쳐다보며 동동걸음을 쳤으나, 아무런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당황하기 시작한 의상은 어쩔 줄 몰라 했으며, 의상의 속셈을 미리 알고 점심초대에 참석한 원효는 더욱 점심독촉을 종용하며 의상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원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오늘 점심초대는 잘못된 것 같소. 오늘은 편히 점심을 잘 공양하나 하였더니 글렀나보오!” 하며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바로 그때다. 원효가 돌아간 지 불과 1분도 채 안된 시각이었다. 선녀가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면서 밥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의상은 몹시 화가 나서 “왜 시간을 지키지 않았소!” 하며 소리치자 선녀는 급한 숨을 가누며 “스님과 약속한 시각에 점심준비를 하여 들어오는데 암자 주위에 수많은 신장들이 암자를 에워싸고 있어 도저히 그를 뚫고 들어올 수가 없어 몇 시간을 지체하고 있다가 이제 막 원효대사가 떠나가시자 그들이 물러감으로 늦게 되었습니다.” 했다. 그제야 의상은 자신의 무릎을 치며 ‘형님은 정말 형님!’ 하며 원효를 시험하려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꼭 이곳 원효암과 천성암에서 두 분이 주석하면서 있었던 일화라고는 단정할 수 없고 팔공산일대 어느 곳에서 원효∙의상대사간에 있었던 한 정담으로 그들은 이후부터 서로를 존경하고 형님 아우처럼 의지하면서 부처님의 힘으로 국태민안과 중생구제에만 진력하였다고 전한다. 위의 전설은 중국의 고승 도선과 의상과의 사이에 당나라 구법 시에 있었던 설화와 유사한 것으로 경산에 태어난 원효 역시 동방에 뛰어난 고승임을 말해주는 큰 본보기로 유래되었을 것이다. .

<자료제공 김종국(구비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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