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메뉴 목록 오시는길 단체관람예약 박물관안내
삼성연동상

이 콘텐츠를 보실려면 Abode Flash Player(무료)가 필요합니다.

대주제 역사적 사건
중주제 문헌기록
소주제 상소
표제어 자인현 복현 상소
시대 조선
참고문헌 내 고장 전통(경산군), 1982, 경산시지(경산시), 1997
필자 김약수
비고
내용 ①1632년(인조 10) 자인면 신관동의 28세의 젊은 유생 백렴(白廉)이 자인현의 복설을 위한 상소장을 안고 단독으로 달려서 3일 만에 한양에 올라갔다. 고을 어른 및 선배 유생들과 의논과 허락도 있었겠지만, 경주부윤의 눈총을 무릅쓰고 행동으로 솔선하였으니 과감한 젊은 선비였다. 창덕궁 앞에 엎드려 소장을 올렸던 바 인조가 해당 관서에 명하여 경상도 감사 정세구(鄭世矩)에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올리라 하교를 내렸다. 자인의 사정과 의견을 적은 경상도의 장계(狀啓)가 미처 조정에 이르기 전에 경주부윤이 앞질러 백렴은 허무맹랑한 거짓을 꾸며 무고한 자라고 조정에 연락하니 해당 관서에서 백렴의 소장을 부당하다고 아뢰어 왕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②1633년(인조 11)에 자인현 복설운동은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경주의 속현으로 시달리던 자인현의 복현(復縣)을 위해 방희국(方熙國)을 대표로 하여 김응명(金應鳴), 이시겸(李時謙), 이광후(李光後)ㆍ이창후(李昌後) 형제, 최두립(崔斗立) 등의 유생이 기획을 주동하였다. 현임(縣任)으로 있던 백현룡(白見龍), 최진강(崔振綱), 안효종(安孝宗) 등도 협력하여 현민의 민심을 모아 이 운동을 후원하였다. 아전도 농민도 종도 참석하였을 상하 300여 인이 자인현민이 대거 상경, 대궐 앞에서 돗자리를 깔고 머리를 조아리며 상소장을 올려 호소하였다. 윤허를 얻어 자인현 복설을 관철시키겠다고 300여 명이 3개월 동안 머물렀지만 끝내 윤허를 받지 못했다. 당시 청나라가 만주에서 발기하여 압록강변을 자주 침범함으로 북쪽 변방의 방비 대책이 시급하니 안된다는 이유였다. 두 번째 좌절에 빠지자, 경주부윤의 횡포가 전보다 가중되었다. 현민을 다스린다는 핑계로 마구 체포령이 내렸고 백현룡, 최진강, 안효종이 형을 받고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한 심문을 당하였다. 산속으로 숨는 사람, 타처로 이사하는 사람도 허다했다. 이러한 사정이 조정에 알려지자 복설을 상소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하지 말 것이며, 민심을 수습하라고 경상도 감사에게 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경주부윤은 여전하였다. 상소의 주동자 방희국과 김근(金瑾)이 심한 곤장의 형을 받고 해읍(海邑)으로 유배 추방되었다. ③1636년(인조 14) 겨울 11월에 청 태종이 한양을 침범하는 병자호란이 있었다. 임진왜란(1592, 선조25) 때 의연이 일어섰던 자인 현민은 의병 봉기의 전례에 따라 경주부윤의 압정에 시달렸음에도 오히려 재빨리 의병을 낼 것을 부르짖고 백현룡이 먼저 인조가 몽진하여 항거하고 있는 남한산성에 달려갔다.백현룡(백련의 재종숙)이 홀로 조정에 나아가서 자인현민이 대거 의거하여 참전할 것과 자인현의 복설을 위한 두 번에 걸쳐 상소한 전말과 그 후의 자인현민이 겪는 고초를 호소하였다. 난리가 끝나고 환궁 후에 상주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백현룡이 크게 용기를 얻고 자인에 돌아와 전후 사정을 동지들에게 알리고 창의를 촉구하였으며, 이에 자인현민은 대거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1637년(인조 15) 초 남한산성에 도달하기 전에 강화가 이루어져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의거로써 목숨과 바꾸어 자인 고장이 경주부에서 분리되기를 바랐던 간절한 마음이었다. 왕이 남한산성에서 환궁 후에 상소하라는 언질을 받았던 바가 있어 이시겸, 김응명, 백현룡 등은 세 번째의 상소를 기획하였다. 이번에는 이시겸이 대표로 하여 김상건(金尙?), 박경룡(朴慶龍)이 따르고 상소장을 올렸다. 조정에서 경상도 감사에게 의견을 올리라 명하였다. 경상도 감사 이경여(李敬輿)가 상계(上啓)한 글은 대강은 다음과 같다. “자인이 복설을 청원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외다. 경주부와 자인현이 서로 상황이 아주 어긋나고 경주부 아전이 침범하는 일 등 기강이 매우 흐트러지고, 됫박의 소금, 한 묶음의 풋나물 땔나무까지 팔아서 사전에 공물을 바치면 이속들은 그것을 굴리는 방납(防納) 등 관의 해독이 한 고을에 가득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으니 당장 이를 안전하게 보전하지 않으면 집은 망하고 백성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며, 여전히 경주부에 속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아주 불행스럽고 정상이 급박하니 지금 변통하지 않을 것 같으면 반드시 뿔뿔이 흩어지는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자인의 물력(物力)은 때에 맞추어 쓸 수 있고, 전결(田結; 조세를 내는 논밭)은 1,000결이 넘고 노비와 이속도 있으니 조정에서 경중을 참작하여 선처하소서.” 라고 회답하였다. 마침내 조정에서”백성이 폐단을 입음이 이와 같으니 원하는 바에 따라 복-설함을 특명한다. 따라서 고을 이름을 옛이름으로 한다.” 경주부에 속현이 된지 620년 만인 1637년(인조15, 정축년)에 자인현은 다시 살아났다.
    

경산문화대사전 페이지 부서 담당자 및 연락처 (행정전화번호 / 이메일)

, ( 053-804-)

패이지별 만족도 평가

만족도평가 : 현재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만족도평가 : 현재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 평가 및 의견남기기 전송